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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10-09-03
조회 :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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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획 믿음의 사람들. 오늘은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으로 일평생 독립운동가, 목회자, 교육자로 살았던 봉경 이원영 목사를 소개합니다. 특히, 이원영 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광복 이후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신사참배 취소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 1954년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이었던 이원영 목사는 1938년 제27회 총회가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을 발표합니다. 광복 후 한국교회의 새로운 출발점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의 양심을 바로세우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원영 목사는 1939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동안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산 순교자'였습니다. 이정순 권사 / 故 이원영 목사 딸 아버지가 살아 나와야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야단을 치셨는지...내가 옥중에서 순교하고 죽기를 각오했는데 왜 이리 살아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나오는 게 하나님 앞에 죄스럽다고 하셨어요. 1886년 안동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이 목사는 문중 사숙을 통해 선비로서 학식을 쌓았고,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을 졸업, 구국운동에도 눈을 뜨게 됩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원영 목사는 예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하게 되고, 이곳 에서 이상동 장로를 만나 1920년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문중에서 제적 되는 등 박해에도 신앙을 지킨 이 목사는 목자의 부르심에 따라 1926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이후 안동에서 목회를 시작한 이 목사는 일제의 집요한 황민화정책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결국 1938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목사는 말씀 선포의 소명을 멈출 수 없어 가족들 앞에서 말씀을 계속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정순 권사 / 故 이원영 목사 딸 법칙에 어긋나는 일, 특히 신앙 면이나 바른 생활에서 어긋나면 예외 없이 무섭게 야단치시고 엄했어요. 광복을 맞이한 1945년부터 1958년 7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원영 목사는 경안노회와 서부교회를 복구하는가 하면 기독인재 양성을 위한 경안고등성경학교 설립,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 혼신을 다했습니다. CTS 송주열입니다. |